공산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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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09-24 19:29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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진남루(鎭南樓)
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대 도성(都城)이었던 사적(史蹟)으로서 아직도 백제 토성지(土城址)가 남아 있다
진남루(鎭南樓)는 공산성의 남문(南門)이며 조선시대(朝鮮時代) 에는 삼남(三南)의 관문(關門) 이었다. 비문(碑文)의 내용은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약 10일간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비(碑)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양식(樣式)이며, 특히 귀부(龜趺)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비문(碑文)은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(申欽)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(南九萬)이 쓴 것이다.
쌍수(雙樹)에 기대어 왕도(王都)를 걱정하던 인조가 평정(平定)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토훈대부(通訓大夫)의 영(令)을 내리셨다는 origin가 있다
- 쌍수정(雙樹亭) 사적비[지방문화재 제35호]
이 비(碑)는 조선 인조(仁祖)가 이괄(李适)의 난(亂)을 피하여 이곳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새긴 것으로 숙종(肅宗) 34년에 세운 것이다.
-쌍수정(雙樹亭)
조선시대(朝鮮時代) 인조(仁祖)가 이괄(李适)의 난(亂)을 피하여 일시 파천 (播遷)한 곳 이다.
- 공북루[珙北樓, 지방문화재 제37호]
공산성의 북문(北門)으로서 선조(宣祖) 36년(1603) 옛 망북루(望北樓)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루건축(門樓建築)의 좋은 예(例) 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과 강북을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(關門)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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공산성
진남루(鎭南樓) 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대 도성(都城)이었던 사적(史蹟)으로서 아직도 백제 토성지(土城址)가 남아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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진남루(鎭南樓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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공산성은 백제의 웅진시대 도성(都城)이었던 사적(史蹟)으로서 아직도 백제 토성지(土城址)가 남아 있다.
- 연지(蓮池) 및 만하루(挽何樓)[지방기념물 제42호]
공산성안에 있었던 연못중 하나이면 단(段)을 둔 석축(石築)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,서 양측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이다. 깊이는 약 9m이고 연못과 금강사이에 만하루(挽河樓) 라는 정자를 세웠다.
- 임류각(臨流閣)
임류각은 백제 제24대 …(To be continued )
다.